지난 편에서 “UN도 물건을 산다”는 이야기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한 걸음 물러나 해외조달시장 전체 지도를 펼쳐보겠습니다. 얼마나 큰 시장인지, 어떤 루트로 접근해야 가능성이 높은지, 그리고 우리 기업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숫자와 그림, 그리고 현장 실무 관점까지 한눈에 정리했습니다.
한 줄 요약. 전 세계 정부와 국제기구가 사들이는 공공조달 시장은 11조 달러 규모입니다. UN은 그 입구 중 하나일 뿐입니다. 해외조달이라는 거대한 시장에 네 개의 루트를 통해 우리 기업에 맞는 진출 경로를 찾아봅니다.
1. 세상에서 가장 큰 ‘빅바이어(Big Buyer)’는 정부입니다
세계은행 분석에 따르면 전 세계 정부가 공공조달로 쓰는 돈은 한 해 약 11조 달러, 세계 GDP의 약 12%입니다.1 환율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1경원대 규모입니다. 도로와 병원을 짓고, 의약품과 사무용품을 사고, 컨설팅과 IT 서비스를 발주하는 돈이 모두 여기에 들어갑니다. 정부는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가장 큰 구매자인 셈입니다.
세계 공공조달 전체 약 11조 달러
↳ WTO GPA 개방 시장: 1조 7천억 달러 이상 (외국 기업에게도 입찰 허용)
↳ UN 조달 시장: 227억 달러 (글로벌 실적 확보의 발판)
이 가운데 WTO 정부조달협정(GPA)으로 외국 기업에게도 차별 없이 열려 있는 시장이 1조 7천억 달러 이상,2 지난 편에서 소개한 UN 조달시장이 227억 달러입니다.3 UN 시장도 작지 않지만, 공공조달 전체로 보면 ‘신뢰도 높은 정예 시장’의 한 조각에 가깝습니다.
👉 핵심은 이겁니다. 정부 조달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구매처이고, UN은 그중 일부일 뿐입니다. UN 조달을 첫 실적(레퍼런스) 축적용 발판으로 삼고, 이후 GPA 개방 시장이나 다자개발은행(MDB) 사업처럼 판이 더 큰 시장으로 단계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2. 해외조달시장으로 떠나는 네 개의 게이트
우리 기업이 국경 밖의 공공 구매자에게 물품·서비스·공사를 파는 시장을 통틀어 해외조달 시장이라고 부릅니다. 해외로 떠나는 길이니 공항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출발지는 같아도, 누가 돈을 대고, 누가 계약서를 쓰며, 입찰공고는 어디에 뜨는지에 따라 네 개의 게이트가 있습니다.

GATE 1. 국제기구 조달
사실 ‘국제기구’의 범위는 UN보다 훨씬 넓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글로벌펀드(Global Fund), 가비(Gavi), 국제백신연구소(IVI)처럼 자체 조달 체계를 갖춘 국제기구도 수많습니다. 다만 통계가 가장 풍부하고 통합 공급업체 등록 체계가 한곳에 잘 정리되어 있는 UN 조달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UN 이외의 국제기구 조달은 연재 뒷부분에서 별도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UN 조달의 최대 장점은 UNGM(UN Global Marketplace)이라는 원스톱 포털 한 곳에 회사를 등록해 두면,4 UN 산하 30여개 기관의 조달담당자들에게 우리 회사 프로필과 카탈로그가 동시에 노출된다는 점입니다.
📁 시장 특징 & 실무 인사이트
- 규모 추이. 2013년 161억 달러에서 출발해 팬데믹 기간(2021~2022년) 백신·응급 의료물품 수요 폭증으로 약 296억 달러까지 치솟았습니다. 이후 조정을 거쳐 2025년에는 227억 달러로, 최근 5년 중 가장 작은 규모였습니다.3·5 그래도 10여 년 전보다 약 1.4배 큰 시장입니다.
- 무엇을 살까(서비스의 반전). 흔히 물품(제조품)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서비스 지출이 전체의 56%(127억 달러)를 차지합니다.3 의약품·백신(35억 달러) 외에도 운송·물류, IT·SW, 엔지니어링 컨설팅, 시설 관리 등 서비스 기업에도 큰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5
- 현지 조달 성향. UN은 사업이 집행되는 현지(아시아 79억 달러, 아프리카 51억 달러 등)에서 조달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5 따라서 우리 기업은 현지 파트너 제휴, 또는 현지에서 대체 불가능한 고성능·고기술 제품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GATE 2. 개발은행 사업 조달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ADB),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같은 다자개발은행(MDB)은 개발도상국에 돈을 빌려주거나 지원합니다. 그 돈으로 도로·발전소·상하수도·학교를 짓는 사업이 생기고, 여기서 입찰이 열립니다.
📁 시장 특징 & 실무 인사이트
- 발주 주체의 차이. 돈은 은행이 대지만, 발주와 계약은 차관을 받은 수원국(수혜국) 정부가 진행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 입찰 규칙. 계약 주체는 현지 정부지만, 돈을 쥔 은행의 조달 규정을 반드시 따라야 하고, 세계은행 사업은 모든 나라의 기업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6
- 정보 습득 전략. 사업 초기에 나오는 일반조달공고(GPN)를 미리 포착하는 게 승패를 갈라놓습니다. 공고는 UN Development Business(UNDB)와 은행 홈페이지에 실립니다.6
- 기관 조달 vs 사업 조달. 은행이 자기 운영을 위해 직접 사는 ‘기관 조달’과, 차관 사업에서 생기는 보다 큰 규모의 ‘사업 조달’이 따로 있습니다.7 대형 건설·인프라·환경·IT 컨설팅 기업이라면 사업 조달을 노리는 게 맞습니다. 넷마루의 입찰·계약 돋보기에서 다루는 공고 상당수가 이 유형입니다.
GATE 3. 외국정부 조달
미국, EU, 일본 같은 다른 나라 정부가 자국 예산으로 사는 시장입니다.
📁 시장 특징 & 실무 인사이트
- GPA의 힘. 원래 각국 정부는 자국 기업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지만, WTO 정부조달협정(GPA) 가입국끼리는 일정 금액(문턱값) 이상의 조달에서 자국 기업과 동등한 입찰 자격을 서로 열어둡니다. 한국도 가입국입니다. GPA로 개방된 조달시장은 1조 7천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됩니다.2
- 나라별 전용 포털 등록이 필수. 미국은 연방 조달 포털 SAM.gov에 CAGE 코드·UEI 번호를 발급받아 등록해야 하고, EU는 공공조달 공고 사이트 TED(Tenders Electronic Daily)를 활용합니다. 나라마다 등록 절차와 서류가 다르니 진출 전에 미리 확인해두는 게 좋습니다.
- 국내에서 접하는 외국정부 조달. 대표적인 예가 주한미군 관련 조달입니다. 한국 땅에서 진행되지만 미국 정부 예산이 투입되므로 미국 조달 절차와 SAM.gov 등록을 그대로 따릅니다. 관련 공사는 주로 미 공병단 극동공병단(USACE Far East District)이 발주를 맡습니다.
GATE 4. 정부간거래(G2G)
기업 간 거래(B2B)나 기업-정부 거래(B2G)가 아니라, 우리 정부(KOTRA 등)가 앞장서서 계약 당사자로 서고, 우리 기업은 물품·서비스를 공급하는 구조입니다.8
📁 시장 특징 & 실무 인사이트
- 신뢰성 극대화. 신용도가 낮거나 진입장벽이 높은 개발도상국 정부를 상대할 때, ‘대한민국 정부’의 보증 효과를 얻어 리스크가 크게 낮아집니다.
- 적용 범위 확대. 과거에는 방위산업(방산물자) 위주였으나, 2014년 대외무역법 개정 이후 플랜트·IT·의료·일반 물자 분야로 대폭 확대되었습니다.8
- 컨소시엄 참여. 중소·중견기업이 단독으로 해외 정부에 입찰하기 어려울 때, KOTRA의 전담 지원 체계를 통해 여러 기업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진출하기에 가장 유용한 트랙입니다.
3. 네 개의 게이트, 한 장으로 비교
| 구분 | GATE 1 국제기구 조달 |
GATE 2 개발은행 사업 조달 |
GATE 3 외국정부 조달 |
GATE 4 정부간거래(G2G) |
|---|---|---|---|---|
| 구매자 | UN 등 국제기구 | 개발도상국 정부 | 외국 정부·공공기관 | 외국 정부 |
| 재원 | 국제기구 분담금·기금 | 세계은행·ADB 등 차관 | 해당 국가 자체 예산 | 외국 정부 예산 |
| 핵심 공고 채널 | UNGM | UNDB, 은행 공식 포털 | SAM.gov(미), TED(EU) 등 | KOTRA G2G 전담관 |
| 규모·특징 | 227억 달러(2025)·서비스 비중 56%·진입장벽 상대적으로 낮음 | 대형 인프라·컨설팅·은행 규정 준수·사전 정보 수집(GPN) 필수 | GPA 개방 1조 7천억 달러 이상·국가별 등록 절차 복잡·주한미군 조달 포함 | 우리 정부가 계약 당사자·개도국 진출 리스크 차단·중소기업 컨소시엄에 유용 |
4. 그렇다면 우리 기업은 어디쯤?
UN 조달만 놓고 보면, 2025년 한국 기업의 실적은 3억 4,600만 달러(점유율 1.53%, 18위)로 최근 10년 중 가장 좋았습니다.3 그런데 품목을 들여다보면 고민거리가 보입니다.
의약품·백신·의료기기가 약 70%(2억 4천만 달러)를 차지하고, IT·물류·엔지니어링·일반 물자는 나머지 약 30%에 그칩니다. 강점이 뚜렷하다는 뜻이지만, 그만큼 한 분야에 쏠려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UN은 서비스를 절반 넘게 사고, 운송·건설·엔지니어링 수요도 큽니다. 우리 기업이 아직 진출하지 않은 분야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부도 의약품·백신 외에 중소·중견기업의 다양한 상품·서비스로 진출 분야를 넓히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3 역설적으로 보면, 우리 제조·IT·서비스 기업들이 아직 깃발을 꽂지 않은 영역이 그만큼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국 기업의 실적과 과제는 6편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5. 처음이라면 어느 게이트부터? — 실전 3단계 체크리스트
현장에서 처음 시작하는 기업에 제가 자주 권하는 곳은 GATE 1, 국제기구 조달입니다. 입찰공고가 UNGM 한곳에 모여 있고, 낙찰 결과도 공개되어 시장을 공부하기 좋습니다. 규모가 작은 견적 요청도 많아 첫 실적을 쌓기에도 부담이 덜합니다. 다만 무작정 입찰하기 전에, 출국 전 여권과 짐을 챙기듯이 아래 세 가지 실무 질문을 먼저 점검해 보세요.
- 우리의 UNSPSC 코드(품목분류)를 사는 기관이 분명히 있는가?
UNGM 연례 통계보고서(ASR)를 통해 최근 3년간 우리 품목을 많이 사들인 UN 산하기관(UNICEF, UNDP, WFP, PAHO 등)을 먼저 핀포인트로 찾아두면 더 정확히 겨냥할 수 있습니다. - 단독으로 할 수 있나, 현지 파트너·컨소시엄이 필요한가?
현지 설치·유지보수·물류망이 수반되는 대형 사업이라면 현지 에이전트 확보나 국내 유관 기업과의 컨소시엄 구성이 낙찰의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 영문 서류·인증·실적이 당장 제출 가능한 수준인가?
영문 회사소개서, ISO 등 국제인증서, 최근 3년 이내의 영문 납품실적증명서(Certificate of Performance)를 미리 갖춰두면, 공고가 떴을 때 바로 지원할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오늘 소개한 네 개의 게이트 중 우리 기업이 가장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곳부터, 등록 방법·입찰 절차·계약 조건이 어떻게 다른지 한 단계 더 깊이 비교해 보겠습니다.
수치 근거
- 세계 공공조달 약 11조 달러, 세계 GDP의 약 12%(2018년 기준): World Bank Blogs, How large is public procurement? (2020)
- GPA 개방 조달시장 1조 7천억 달러 이상(WTO 추정): 미 의회조사국(CRS), WTO Agreement on Government Procurement
- UN 조달 2024년 257억·2025년 227억 달러, 2025년 물품 99.7억·서비스 127.3억 달러, 한국 실적·품목: 외교부·조달청 보도자료(2026.7.15.) 게재 기사, UNOPS 「2025년도 유엔 조달통계 보고서」 기반
- UNGM 통합 등록: UNGM, What is the United Nations Global Marketplace?
- 2013~2023년 UN 조달 추이, 2023년 품목·지역별 조달액, LDC 조달 비중: UNOPS, Annual Statistical Report on UN Procurement 2023
- 세계은행 사업 입찰 자격, GPN·UNDB 게시: World Bank, A Beginner’s Guide for Borrowers (2023)
- 개발은행의 기관 조달과 사업 조달 구분: 미국 상무부 ITA, Guide to Doing Business with the MDBs
- 정부간 수출계약 제도(2014년 대외무역법 개정, KOTRA 전담): 중기이코노미 보도
※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무관합니다.
※ 작성 기준일: 2026.10.13.
